40여 년간 용산구의 청소년들에게 조용히 꿈을 건네 온 이가 있다. 늘 한결같이 지역을 지켜온 이웃, 박병용 어르신이다. 겉보기엔 평범한 동네 어르신 같지만, 그는 누구보다 깊은 애정으로 용산구를 품어 온 삶의 주인공이다.
글. 김민선 사진. 엄태훈
1962년, 군 복무를 마치고 아내의 손을 잡고 정착한 곳은 용산구 후암동. 이후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박 어르신은 1980년 자신의 호(號)인 ‘지웅(志雄)’을 따 ‘지웅장학회’를 설립했다. ‘뜻을 크게 가지라’는 마음이 담긴 뜻처럼, 그는 해마다 용산구 학생 6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며 배움의 길을 응원해 왔다.
“나라 살림도 어려웠던 시절이었지요. 저처럼 공부하고 싶어도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접는 일이 없었으면 했었습니다.”
학업의 길을 끝까지 걷지 못한 자신의 아쉬움이 오히려 누군가의 배움에 대한 간절한 격려로 이어졌다. 그는 금액보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의 손길은 단순한 후원을 넘어 아이들과 그 가정에 삶을 밝히고, 동네 주민들의 작은 후원의 손길을 보태는 ‘희망의 씨앗’이 되었다.
장학회 외에도 박 어르신은 이웃과의 관계를 삶의 중심에 두었다. 1970년대부터 새마을협의회, 주민자치위원회, 지역사회보장협의회, 노인복지후원회 등에서 중책을 맡아 공동체의 화합을 이끌었다. 그는 ‘함께 잘 사는 마을’을 꿈꾸며, 발로 뛰는 삶을 실천해 온 것이다.
“3·1 독립운동 유공자이신 박권영 옹이 저의 친할아버지세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한 동네에 오래 살다 보니 자연스레 마을 사정에 밝아 좋은 이웃들과 뜻을 모으는 여러 일을 하게 되었지요.”
지금도 그는 ‘살기 좋고 인심 좋은 후암동’, ‘더불어 잘 사는 대한민국’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히 책임을 다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말한다. 박 어르신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나눔은 용산 곳곳에 따뜻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조용히, 꾸준히, 그리고 진심으로 실천해 온 삶. 오늘의 용산을 있게 한 귀중한 용산구민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