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동네 산책

푸른 언덕을 걷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있는 청파동 골목

박인숙 용산구명예기자
삼대의 추억과 시간이 쌓인 청파동

청파동은 푸른 언덕이 많았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청파동은 나의 할아버지 대부터 아버지 대를 지나 나에게 이르는 시간 동안 삼대를 품어준 고향이다. 또한, 청파동길은 예전에 비해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기에 언제나 추억을 담아 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하루 날을 잡아 걷기로 했던 길의 시작은 현재 청파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서계동이다. 이곳은 예전에 만리동 고개의 일대이자 서울역 뒤쪽에 위치한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36년부터 서계정(西界町)으로 불리다가 1946년 서계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은 또한 배다리(청파배다리)라고 불리던 곳이 있었는데, 현재의 청파동 1가 168번지, 현재의 갈월동 쌍굴다리 만조천(욱천)에 놓였던 징검다리로 남대문에서 나오는 삼남대로상의 중요한 다리였다고 한다. 길을 걷다 보니 ‘청파배다리’ 표석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본부 건물 앞 도로에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청파배다리 터를 지나 청파동의 골목을 걷다 보면 청파동주민센터가 보인다. 청파동주민센터는 마치 기다려 준 것처럼 짠하고 나타나는데 입구에 있는 단풍나무 덕분인지 아담한 정원 같은 느낌이다. 필요한 서류를 떼고 노정하 청파동 동장님을 만나게 되어 사진 한 컷을 부탁드렸다. 언제나 주민들의 복지와 편안함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신다.

노정하 청파동 동장님

『불편한 편의점』의 표지는 마치 웹툰의 한 장면 같다.

청파동의 따뜻함을 그린 이야기와 음악

숙명여대 방향으로 접어든 염 여사는 사내를 꼬리처럼 매단 채 골목을 두어 번 지나 작은 삼거리에 다다랐다. 삼거리로 갈라지는 모퉁이에 자리한 편의점. 그것이 염 여사가 소유한 작은 사업체였고, 사내에게 다시 도시락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불편한 편의점』 中

2021년 출간된 김호연 작가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에 나오는 대목이다. 내내 따뜻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청파동이 나오는데, 책의 주인공인 염 여사가 운영하는 ‘Always’라는 편의점은 아마도 숙명여대로 올라가는 길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그 길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숙명여대길이 과거에는 어땠을까 궁금해져 과거의 그 길을 찾아보았다.
숙명여대 입구의 과거 1976년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해 보니 정말 많은 변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47년 전의 숙명여대 근처는 개발이 이제 막 시작되는 모습이라 길도 상가도 아직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마치 오래된 책장에서 책을 꺼내듯 추억들이 한가득 쏟아지는 느낌이라, 옛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겨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수 있었다. 『불편한 편의점』에 나오는 삼거리가 아마도 여기 어디쯤이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청파동을 배경으로 한 음악도 있다. 정밀아 아티스트의 앨범 <청파소나타>에는 넓지는 않지만 아늑한 골목이 있는 청파동 거리 어딘가를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한 매우 서정적인 음악이 가득하다.
앨범제목에 들어간 ‘청파(靑波)’라는 푸른 언덕이라는 표현과 함께 음악으로 풀어낸 느낌이 들어 정적이면서도 바쁜 청파동을 잘 느낄 수 있다. 타이틀곡인 ‘서울역에서 출발’로 시작되는 음악은 조용한 거리의 소음들이 길로 이어지듯 유연하게 뻗어나가는 음악의 느낌으로 청파동 골목의 편안함을 표현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래서였을까. 청파동의 골목들은 언제나 다정하게 느껴졌다.

① ‌1976년 숙명여대 입구(출처: 서울기록원)

② 2023년 현재

③ 청파동의 골목들

④ 청파동의 골목들

⑤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묘

⑥ 백범 김구 기념관 가는 길

청파동에 익숙해지는 시간

청파소나타를 감상하며 효창공원으로 들어서면, 이어지는 길 끝에 왼쪽에는 독립운동을 하신 4분 의사의 묘와 오른쪽으로는 백범김구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지도로 표시된 청파동을 한 바퀴 돌아보니 약 두 시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마치 탐험을 하듯이 동네를 걷고, 골목을 들어가 보니, 바쁘게 살아가는 속에서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얼마나 많은 기록을 시간 속에 채워왔는지 잊고 지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길 위의 표석이 반가웠고, 주민센터가 보였으며 과거로 돌아가 숙명여대 삼거리도 찾아보게 되었다.
푸른 언덕이 많아 공기도 순했을 것 같았던 이 동네가 지금은 미세먼지로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래도 푸름과 온기를 품은 따뜻한 골목들이 있어 과거와 현재가 섞여 있는 청파동을 또다시 걸어보게 할 것 같다. 마치 『불편한 편의점』의 덩치가 곰 같은 사내 독고가 그렇게 청파동에 익숙해졌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