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의 임진왜란
‘왜명강화지처’ 비석 전경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을 공격해 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5월 3일에 서울이 함락되었으니 일본군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20일밖에 걸리지 않은 셈이다. 그 중간에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다.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패했는데, 이것이 그나마 전투라고 할 만했다. 국왕 선조는 4월 30일 새벽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고, 5월 1일 개성, 5월 7일 평양을 거쳐 6월 22일 국경 도시 의주에 도착했다.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들어갈 심산이었다.
전쟁 중의 ‘전쟁과 평화’
선조는 왜 싸워 보지도 않고 비겁하게 도망을 친 것일까? 신하들, 백성들과 함께 한양에서 싸웠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이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면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선조를 비난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과 일본의 군사력을 비교할 때 과연 이길 수 있었을까? 전쟁은 정신력이 아니라 객관적인 군사력으로 승패가 갈리는 것 아닌가? 만약에 선조가 한양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잡혔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대비했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이 전쟁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 전, 일본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통신사를 파견해서 정탐하게 했다. 통신사로 갔던 두 사람의 보고가 서로 다른 것이 문제였지만, 각자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있었으니 앞일을 점치지 못했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이순신을 발탁한 것도 전쟁에 대비한 것이었다. 1591년 2월에 지방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 현감은 종6품, 전라좌수사는 정3품이니, 지금으로 치면 6급 공무원을 한번에 3급 부이사관으로 승진시킨 셈이다. 반대가 심했지만 인재를 알아본 선조의 단안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아무리 대비한다 한들 200년 동안 평화를 누린 조선이 100년 넘게 내전을 치룬 일본과 군사력으로 맞서기는 불가능했다. 또 조선은 건국 이후 줄곧 명나라에 사대하면서, 명나라가 건재한 한 동아시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자주적인 국방력을 갖추는 데 소홀했다.
의주까지 밀린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명나라의 판단에, 일본군을 조선에서 막지 않으면 압록강을 건너올 것이 뻔했다. 그 전에 조선에서 막아야 했다. 이런 계산에서 명나라 군대가 파견되었고, 1593년 1월 9일 평양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 여세를 몰아 한양으로 진격했으나 1월 말 벽제관(지금 경기도 고양시)에서 패배하고 평양으로 후퇴했다. 이때부터 명나라 군대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강화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협상이 진행되면서 4월에 일본군이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났다. 4년 만에 협상이 결렬되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 7년 전쟁 가운데 전투는 1592년 4월 개전 이후 약 10개월 동안과 1597년 8월부터 16개월 동안에 집중되었고, 나머지는 강화 협상을 벌이며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전투보다 협상의 시간이 더 길었다.
현재의 심원정. 정자의 모습과 위치가 고증된 것은 아니다.
서울 용산의 강화 현장
지금 용산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 협상을 벌였던 장소를 알려 주는 유물이 있다. 용산문화원 근처의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 즉 ‘왜와 명이 강화한 곳’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그것이다. 이 여섯 글자 위에 심원정(心遠亭)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심원정이라는 정자에서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 협상을 벌였고, 그 장소를 지정해서 이 비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비석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추정이다. 안내문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심유경과 왜군 장수 고니시가 강화 회담을 한 장소로 전해진다”라는 설명이 있다. 심유경은 명나라 장군으로 일본과의 협상을 담당했다. 그가 1593년 4월 20일에 용산에 있었던 사실이 실록에서 확인되므로 이 설명이 사실에 가까울 듯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회담을 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이 비석을 누가 세웠는지도 알 수 없다. 안내문에는 “회담 후 일본과 명나라가 강화를 한 곳이란 뜻의 ‘왜명강화지처’ 비를 세우고 기념으로 백송을 심었다”라고 했지만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왜명강화’라는 말도 어색하다. 조선이나 명나라에서 비석을 세웠다면 ‘왜명강화’가 아니라 ‘명왜강화’라고 썼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사람이 세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倭)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비석을 언제 세웠는지도 알 수 없다. 수수께끼투성이의 비석이다. 게다가 조선은 빠져 있다. 어떻게 조선을 빼놓고 명과 일본이 강화를 한단 말인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에 대해서 조선은 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조선을 침략한 왜놈을 한 사람도 살려 보낼 수 없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명나라는 전쟁을 더 하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일본군을 조선에서 막는 것이 목표였으니 당연한 태도였다. 일본은 명나라의 개입으로 승산이 없어진 이상 더 싸울 일이 없었다. 일본은 조선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는 것을 강화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이에 조선은 속이 탔지만, 싸울 수가 없었다. 군사력도 부족했지만, 명나라가 막았기 때문이다. 전투 금지 명령을 어긴 조선 장수들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전작권이 조선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 중에 진행된 강화 협상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명나라에 기대서 평화를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것이 용산의 ‘왜명강화지처’ 비석 앞에서 해야 할 생각이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중 강화 협상이 벌어진 장소를 표시한 거의 유일한 역사적 유물이다. 흔히 영광스러운 사건의 현장을 복원하고 기념하려고 하지만,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전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기억해야 되풀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