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고려 보물, 현화사 석등
고려 태조 왕건은 결혼을 아주 여러 번 했다. 무려 29명이나 되는 부인을 두었는데, 거의 정략결혼이었다. 그래서인지 부인들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지 않았고, 자녀도 아들 25명, 딸 9명으로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왕건이 죽은 뒤에는 아들들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죽고 죽이며 싸우는 바람에 증손자 세대가 되면 왕실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로 남은 사람이 바로 현종이었다. 하지만 현종은 탄생부터 비화가 있었다.
태조의 아들 가운데 왕욱이란 사람이 있었다. 뒷날 대종으로 추존되므로 흔히 대종 욱이라고 부른다. 대종 욱은 왕건의 딸인 이복 누이와 결혼해서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이 제6대 국왕인 성종이고, 두 딸은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이다. 이들을 왕후라고 부르는 것은 둘 다 제5대 국왕인 경종의 왕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경종 역시 태조의 손자이니, 경종과 헌애·헌정왕후는 사촌 간이다. 대종 욱의 결혼이나 경종의 결혼은 모두 왕실의 근친혼인데, 지금 눈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옛날에는 그랬나보다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여기까지는 놀랄 일이 아니고, 정작 놀랄 사건은 경종이 죽은 뒤에 일어났다. 과부가 된 헌정왕후가 궁궐에서 나와 살다가 마침 옆집에 살던 삼촌 왕욱(왕건의 아들로, 대종 욱과는 다른 사람이다. 뒷날 안종으로 추존되므로 안종 욱이라고 부른다.)과 눈이 맞아 아이를 갖게 되었다.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안종 욱을 멀리 사수현(지금 경남 사천시)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해에 헌애왕후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대량원군(뒤의 현종)이다. 그래서 아버지 쪽으로는 왕건의 손자이고 어머니 쪽으로는 왕건의 증손자라고 한 것이다.
불륜으로 치면 언니인 헌애왕후가 더 했다. 헌애왕후는 경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이 경종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제7대 국왕인 목종이다. 아들이 왕이 되었으므로 헌애왕후는 대비가 되었는데, 고려에서는 대비를 태후라고 했고, 처소가 천추전이었으므로 천추태후라고 불렸다. 그런데 태후가 외간 남자인 김치양과 사통해서 아들을 낳았다. 당시로서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아들로 왕위를 이으려는 욕심을 냈다. 어머니 쪽으로 왕건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왕위를 이을 자격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대량원군이었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없애기로 작정하고 강제로 출가시킨 다음 삼각산 신혈사로 보냈다. 서울의 진관사가 바로 그 절이다. 그리고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한 스님의 기지로 대량원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속설에는 그 스님의 이름이 진관이었고, 그래서 뒤에 신혈사를 진관사로 고쳤다고 한다.) 천추태후는 목종이 장성하도록 섭정하면서 국정을 농단했지만 결국 정변으로 불행한 종말을 맞았다. 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쳐들어와 김치양과 목종을 죽이고 신혈사에서 대량원군을 모셔다 국왕으로 세웠다. 정인과 아들을 모두 잃고 권력마저 빼앗긴 천추태후는 외가가 있던 황주로 쫓겨나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해서 한 편의 드라마가 끝나고, 그 뒤로 현화사 이야기가 이어진다.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현종은 곧바로 거란의 침략을 당해 나주까지 피난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강감찬을 비롯한 신하들의 도움으로 거란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고, 개경으로 돌아와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그것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사수현에 있던 아버지 묘를 개경 근처로 옮기고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 바로 현화사이다. 현화사는 국왕이 직접 지은 절이었으므로 규모나 화려함에서 여느 절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을 것인데, 그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석등이다.
현화사 석등은 현화사 창건 직후인 1020년에 건립되었다. 높이가 4.2m에 달하는 데다 불을 밝히는 불발기집(화사석)이 장구 모양의 네 기둥을 세워 놓은 독특한 양식이고, 아래의 기둥도 장구 모양에 정교한 조각을 해서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불발기집과 지붕을 팔각이 아니라 사각형으로 만드는 것이 고려시대 양식으로 은진미륵이 유명한 충남 논산의 관촉사에도 이와 비슷한 석등이 있다. 현화사는 고려 말에 폐사되고 절터만 남았는데, 그곳에 있던 석등이 일제강점기에 경복궁 경내로 옮겨졌다. 해방 후에 경복궁 중앙박물관 뜰에 전시되었다가 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함께 있는 배례석은 현화사에 있던 것이 아니다.)현화사에는 이 석등 말고도 7층 석탑이 있었다. 통일신라에서 3층 석탑이 주로 만들어지다가 고려에서 5층, 7층, 9층, 13층 등으로 다양한 석탑이 만들어지는 양식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현화사 석등과 7층 석탑은 서로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이다. 이뿐 아니라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의 수많은 탑과 비석들은 모두 제자리를 떠나 낯선 장소에 와 있는 셈이다. 그 하나하나가 고향을 떠나게 된 사연을 지니고 있다. 그저 지나가지만 말고 한 유물 앞에 오래 머물며 그 사연을 들어주면 어떨까? 현화사 석등 앞에서는 어려서 여읜 부모를 그리워하는 현종의 효심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현종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 현종은 삶이 곧 드라마일 뿐 아니라 거란의 침략에서 고려를 구하고 자손을 많이 두어 왕실을 다시 번성하게 한 고려의 중흥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