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도 더 된 새것, 신용산
서울은 오래된 도시이고 거대한 도시이니만큼 없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유독 보기 드문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하천이다. 특히 사대문 안에는 하천이 거의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 등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지역에 도시가 들어섰으므로 그 안에 떨어진 빗물은 모두 하천을 통해 청계천에서 모이고,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한 뒤 한강으로 들어가는 물길이 만들어졌다. 즉, 조선 시대 사대문 안에는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많은 하천이 있어서 백성들의 빨래터가 되기도 하고 수다판이 되기도 했으며 오물을 실어 나르는 하수도 역할도 했다. 각각의 이름도 백운동천, 옥류동천, 사직동천, 삼청동천, 대은암천, 안국동천, 정릉동천, 안암천, 홍제천 등등으로 불렸고, 이 하천들을 건너기 위한 다리도 도성 안에만 거의 80개 이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근대 이후 도시화 과정에서 하천은 거의 모두 복개되어 땅속으로 숨게 되고, 다리는 이름만 남게 되어 서울은 메마른 도시가 되고 말았다. 만초천도 그렇게 해서 이름만 남고 사라졌다.
만초천은 인왕산에서 발원해서 도성 밖에서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었다. 인왕산을 분수령으로 해서 도성 안쪽으로는 백운동천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갔고, 바깥에서는 무악천과 만초천으로 흘렀다. 지금은 복개되어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조선 후기 지도에는 인왕산에서 한강에 이르는 만초천의 존재가 분명히 확인된다. 그 중간에 후암동에서 합류하는 지천이 있어서 후암천이라고 했고, 이태원 쪽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지천이 하나 더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욱천(旭川; 아사히카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5년에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하천 복개 사업이 진행되어 1962년에 후암천이 복개되었고, 만초천은 1966년부터 1979년까지 4차에 걸친 복개 공사 끝에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청파동에 있는 청파 배다리 터 표지석과 신계동에 있는 욱천 고가차도의 이름에서 만초천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미군 용산기지 안에 지천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용산구는 조선 후기 한양의 5부 43방 가운데 서부 용산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름만 그렇고 실제로 용산방에는 지금의 용산구 일부와 마포구 일부가 포함되었고, 용산구의 다른 일부는 용산방 옆의 남부 둔지방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용산방과 둔지방의 경계가 바로 만초천이었다. 옛 지도를 보면 만초천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용산이 있고 오른쪽에 둔지산이 있어서 각각 용산방, 둔지방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용산방과 둔지방은 조선후기 한강을 이용한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새로 생긴 행정구역이었다. 그런데 개항 이후에 일본인들이 여기로 이주해오면서 더 큰 변화가 일어났다. 1876년 개항과 동시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처음에는 일본인들의 국내 거주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러던 것이 1882년 임오군란 뒤에 제물포조약이 체결되면서 내륙에 외국인의 상업 활동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이 들어섰고, 서울 근처에서는 양화진이 개시장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양화진이 너무 좁다며 주변의 다른 곳을 찾아 나섰는데, 그때 용산이 일본인들의 눈에 띄었다. 용산에서 남대문까지 가는 길이 넓고 오르막길이 없어 수레가 다니기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뒤로 용산 지역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용산의 일본인 거주는 1904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경의선 철도를 개통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해서 용산에 300만 평에 이르는 군대 용지를 확보했고, 그곳에 군사 기지뿐 아니라 용산역 등 철도 관련 시설을 배치하고 나머지는 일본인 상공업자들에게 헐값에 불하했다. 그 결과 지금의 한강대로 일대에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그 지역을 신용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용산의 등장으로 본래 용산은 난데없이 구용산으로 전락했다.) 용산의 일본인 인구도 크게 증가하여 1892년 11명에서 1910년에는 10,438명이 되었다. 특히, 신용산은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이 살았고, 구용산도 신용산과 가까운 지역에는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많이 살았다. 토지도 거의 일본인 소유였는데, 한 연구에 따르면 용산의 전체 면적 가운데 90% 가까이를 일본인이 소유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둔지방의 서쪽은 신용산이 되었지만 둔지산 일대는 군용지로 수용되고 그 주민들은 지금의 용산가족공원 자리로 이주했다가, 1917년에 일본군 기지 확장에 따라서 다시 보광리(지금은 보광동)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마을 이름을 조선 후기부터 지어둔계 또는 둔지미 마을이라고 불렀는데, 그 강제퇴거와 이주의 역사가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될 정도이다.(김천수,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2021).
지명에 새롭다는 ‘신(新)’자를 함부로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나 새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과 이름이 같이 가야 명실상부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