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의 천주교 유적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할 예정이다.)
새남터 기념성당
이렇게 해서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신앙이 퍼져나가는 한국 천주교의 독특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천주교는 곧 조선의 유교 윤리와 충돌했고 탄압을 받게 되었다. 천주교가 유교식 제사를 거부할 뿐 아니라 양반과 상민·노비의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더욱이 남녀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마다 천주교도들은 목숨으로써 신앙을 증명했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솔뫼에 살던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1784년 무렵 김대건의 큰할아버지 김종현과 할아버지 김택현이 천주교에 입교했고, 이어서 증조할아버지 김진후가 두 아들을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아버지 김제준도 신자였다. 이렇게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대건은 16세 때인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해서 신학을 공부했고, 중국 상하이에서 신품 성사를 받고 신부가 되었으며, 1845년에 귀국해서 선교 활동을 벌이다 이듬해 2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순교할 결심을 할 수 있었나 궁금했는데, 그 집안 내력을 알고 보니 이해가 간다. 증조할아버지 김진후가 1814년에 순교했고, 아버지 김제준도 1839년에 순교한 ‘순교자 집안’이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 :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이하여 문학진 화백이 그린 것이다
출처: [성 김대건 신부(고 문학진 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0. 제공]
한편, 한국천주교 최초의 신학교인 용산신학교가 1887년에 원효로, 지금의 성심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설립되었고, 산천동의 용산교회에는 한국교회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신부를 비롯해서 초기 성직자들의 유해를 모신 성직자묘지가 있으니, 용산구의 천주교 유적 또한 적지 않다고 하겠다.
삼각지성당 전경 : 작지만 73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한편,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뒤 유해는 안성 미리내로 옮겨졌다가 1901년 용산신학교로 이장되어 6.25 전쟁으로 밀양으로 피난할 때까지 50년 동안 용산에 머물렀다. 지금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여러 곳에 모셔져 있는데, 새남터 성지도 그중 하나이다. 또 김대건 신부가 일곱 살 때 고향인 솔뫼를 떠나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하던 중간에 잠깐 서울 청파에서 산 적이 있다고 하니(한국교회사연구소, 「김대건 신부 연보」『교회사연구』12, 1997) 이래저래 용산은 김대건 신부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