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용산 전성시대
서울의 25개 구 가운데 아래서 세 번째로, 중구와 종로구만이 용산구보다 인구가 적다. 하지만 한때는 용산 인구가 서울에서 가장 많았던 적이 있었다.
조선 후기 <도성대지도>에 보이는 용산방, 둔지방, 한강방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들은 국가에 세 가지 의무를 졌다. 첫째는 전세(田稅).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의 일정 비율을 국가에 내는 것이다. 둘째는 공납(貢納). 국가에서 정해준 특산물을 현물로 내는 것이다. 셋째는 역역(力役).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군대에 가는 군역(軍役)과 성이나 제방 쌓기, 길 내기 같은 공사에 동원돼서 일하는 요역(徭役)으로 나뉘었다. 하나같이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도성 사람들은 전세와 공납, 군역을 면제받았다. 그 대신 방역(坊役)이라고 해서 도성의 유지, 관리를 위한 공사에서 일하고 전세 대신 집과 대지에 대한 세금을 내면 되었다. 서울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에서 특혜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성저십리 사람들은 어땠을까?
성저십리 사람들은 경기도민으로서 전세, 공납, 역역을 지는 외에도 도성 사람들과 같이 방역을 져야만 했다. 누가 봐도 부당한 대우였다. 성저십리 주민들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고, 결국 1461년(세조 7년)에 성저십리를 경기도에서 떼어내 한성부의 중부를 뺀 나머지 4부에 소속시켰다. 이때 용산은 한성부 서부에 속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성저십리 주민들을 각종 잡역에 동원하는 일이 계속되다가 성종 때 『경국대전』에 가서야 도성 사람들과 같게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비로소 서울 사람이 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17세기 후반부터 서울의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강을 이용한 상업이 발달하면서 한강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러한 현상은 자연스럽게 행정 구역의 개편으로 이어졌다. 영조 때인 18세기 후반에는 조선 초의 5부 52방이 5부 43방으로 개편되었다. 도성 안의 작은 방 14개가 통폐합되어 없어지고 대신 남부에 두모방(豆毛坊), 한강방(漢江坊), 둔지방(屯之坊)과 서부에 용산방(龍山坊), 서강방(西江坊) 등 5개 방이 새로 생긴 결과였다. 신설된 5개 방은 모두 한강변에 있었다. 용산이 지명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 용산처 이후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뒤로도 한성부 인구는 계속 증가했고 방도 신설되어 북부에 상평방(常平坊), 연희방(延禧坊), 연은방(延恩坊)과 동부에 경모궁방(景慕宮坊)이 추가된 결과 47방이 되었다. 이때는 청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서울과 의주를 잇는 도로변에 인구가 증가한 결과 4개 방이 신설된 것이었다. 이 47개 방 가운데 용산방의 인구가 가장 많았다. 1789년(정조 13년) 통계에 따르면 한성부의 전체 인구는 18만 9,153명이었고, 용산방이 1만 4,915명으로 전체의 7.8%를 차지했다. 인구 1만 명이 넘는 방은 용산방 외에 반석방(1만 3,882명), 반송방(1만 2,971명) 밖에 없었고, 인구 3천명 이하인 방도 21개나 되었으니 용산방 인구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용산방의 영역이 지금의 용산구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지금 마포구의 마포동, 공덕동 일대도 용산방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용산방 동쪽의 한강방과 둔지방이 지금의 용산구가 된다. 그럼 우리 동의 조선 후기 주소를 찾아보자. 찾아서 ‘조선국 한성부 ○부 ○○방 아무개’라고 쓰면 된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으니 값비싼 물건은 보내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