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전에는 일본군이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1882년에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한 일이 있었다. 그해 6월 군인들이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임오군란). 이들은 대원군을 추대하고 민씨 정권의 급진적인 개화정책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그러자 민씨 일파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파견되어 서울 주요 지역에 진을 쳤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 용산고등학교 남쪽, 미군 기지의 북쪽 끝 지점이었다. 당시 청군은 대원군을 이곳으로 유인한 뒤 톈진으로 납치하고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자국민의 저항을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하려 했던,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태였다. 어쨌든 이것이 용산 외국군 주둔의 두 번째 역사이다.
세 번째 외국 군대 주둔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있었다. 그해 2월 전봉준이 지도하는 고부민란을 시작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또다시 청에 도움을 요청했고, 청이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 역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조선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6월 일본군 약 8천 명이 서울로 진입해서 만리창과 둔지산 등 주로 용산지역에 주둔했다. 이 군대가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세웠으며, 더 나아가서는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우고 서울로 북상하던 동학농민군을 공주 우금치에서 무참히 학살했다.
러일 전쟁 중이던 1904년 8월, 일본은 용산에 300만 평, 평양에 393만 평, 의주에 282만 평의 땅을 군용지로 수용한다고 통보해왔다. 대한제국 정부가 항의했지만,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일축했다. 그러자 군용지에 사는 사람들이 수용에 반대하고 나섰다.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상황에서 당연한 저항이었다. 내부대신은 전쟁이 끝나면 반환될 것이라고 회유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원주민들이 모여 철야 농성을 벌이자 헌병대가 강제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주민 2명이 사망했다. 평양에서는 일본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수백 명이나 나왔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가던 1905년 6월 무렵부터 일본이 토지 수용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군 기지 건설이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 후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7월 27일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용산, 평양, 의주의 군용지 약 1,000만 평에 대한 배상금으로 20만 원을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평당 2전이었다. 당시 신문 한 장 값이 7전이었으니, 보상이 아니라 강탈이었다. 결국 평당 보상가를 용산은 30전, 평양 7전으로 하고 의주는 무상 수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주민들은 헐값 보상에 계속 저항했지만, 보상금 지급이 1909년 8월에 종료되면서 많은 사람이 헐값의 보상금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났다.
이렇게 해서 용산에 300만 평을 확보한 일본은 그곳에 군사기지를 만들고, 남는 땅은 일본 사람들에게 싼값으로 불하했다. 그래서 지금 한강대로 일대 일본인들의 신시가지가 건설되고 그 지역을 신용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은 한국인들을 협박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고, 특히 1910년대 무단통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다 1930년 이후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자 국경을 넘어 출병하기도 했다. 전선이 확대되면서 군인이 부족해지자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고 한국의 젊은이들을 용산 기지에서 훈련시켰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5년 동안 무려 16,830명이 그렇게 전쟁터로 나갔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뒤에는 일본군이 해외 전선에 투입되면서 용산 기지는 후방의 지원부대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당시 용산에는 약 2만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패망과 함께 일본군이 모두 철수하고 그 땅이 한국인의 품으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1945년 9월 8일 인천으로 들어온 미군이 38선 이남 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했고, 9월 9일 일본군이 용산에서 철수하자 그 기지는 미군에 의해 접수되었다. 미군 기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돌려받을 미군 기지에는 이런 아픈 역사가 있다. 기지 안에는 당연히 일본군 기지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 보도에 따르면 일제 때 지어진 건물만도 226개 동이나 된다. 이것도 민족정기 운운하며 다 없애버릴까? 제발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 역사는 땅에 흔적을 남기며 겹겹이 쌓여가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아픈 역사, 부끄러운 역사도 당연히 있고, 그것들도 모두 우리 역사의 일부이다. 그런 역사도 있는 그대로 남겨두고 소화해낼 만큼 우리의 국력이 신장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