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 보물창고가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1986년 중앙청 건물로 이전했다. 이 건물은 본래 조선총독부 청사였고, 해방 후 중앙청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부청사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청사가 광화문과 과천에 새로 만들어지면서 중앙청 건물이 비게 되자 활용 방안을 논의한 끝에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박물관의 의지와 무관한 빈자리 차지하기였다.
1995년에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다. 총독부 건물은 곧 국립박물관이었다. 건물이 철거되면서 박물관의 유물들은 바로 옆에 있는 사회교육관 건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1996년 12월에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하지만 박물관의 용산 이전 계획이 이미 수립되어 있었던 만큼 이번의 이전은 있을 곳이 없어진 유물들이 잠시 머물기 위한 것이었고, 9년 만인 2005년에 용산 새 박물관으로 이전해서 오늘에 이른다.
박물관의 유물들이 해방 후 몇 번이나 이사를 다녔을까? 세계 어느 문명국의 유물들이 우리처럼 자주 이사를 다녔을까? 최소 수백 년 이상 된 유물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는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자리에 오래도록 있게 하고, 옮기지 않아야 한다. 전쟁으로, 건물 철거로 이미 그 예의를 어겼으나, 이제부터라도 용산에서 천년만년 안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박물관이 길에서 멀리 떨어지는 바람에 넓은 앞뜰을 품게 되었고, 그곳에는 자연스럽게 야외 전시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박물관의 동쪽, 한글박물관에서 박물관 쪽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끄트머리에서 시야가 넓게 트이면서 배롱나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석탑이 눈에 들어오고 그 주변에 석탑과 석등, 부도들이 늘어서 있다. 이번에 눈여겨볼 유물은 그 오른쪽에 있는 석등이다.
석등 앞 돌판에는 이름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이고 고려 10세기에 만들어졌으며, 보물 제282호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설명이 뒤따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 석등들은 모두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앞, 뒷다리를 길게 뻗어 불발기집을 받치고 서 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이 모두 그렇다. 그래서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이 이채롭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다른 쌍사자 석등에 대해서 알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을 더 잘 알 수 있다. 알면 더 많이 보이는 것이니,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더욱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이 쌓여가는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다.
쌍사자 석등뿐 아니라 고달사의 비석도 용산 박물관에 있다. 본래 이 절은 고려 초의 고승 원종대사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대사가 입적한 뒤 광종의 명으로 부도와 비석을 세웠다. 부도는 고달사에 있지만, 비석은 받침대(귀부)와 지붕(이수)만 고달사에 있고 비신은 1916년에 무너져 여덟 조각으로 쪼개지는 바람에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쌍사자 석등도 고달사 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59년에 경복궁으로 옮겼고, 박물관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고달사의 유물들은 이산가족이다. 사람이든 유물이든 가족의 헤어짐은 슬픈 일이다. 또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 제 가치를 갖는 법이다. 이 둘을 합치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야외 전시장의 다른 유물들도 모두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연일까? 이런 생각과 함께 유물들에게 잠시라도 눈길을 주기를 권한다. 오래된 유물에 대한 두 번째 예의는 예술품으로 대접하고 감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