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생각하는 한강철교
강은 곧 길이었다. 뱃길을 통해 상류 지역에서 생산된 각종 물자와 전국에서 걷힌 조세가 서울로 집중되었다. 조선 건국 후 한양이 수도가 된 데는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며 교통이 편리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동시에 강은 길을 막기도 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했고, 큰 강은 그만큼 왕래하기가 힘들었다. 한강은 동서로는 길이었지만 남북으로는 길을 막았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정조 때 국왕의 화성(수원) 행차를 위해 주교(舟橋; 배다리)를 놓은 것이 처음이었다. 큰 배 약 40척을 굴비 엮듯이 옆으로 길게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길을 만들었다. 왕의 행차 때만 만들어 사용하고 곧 해체했지만 그림이 남아 있어 그 모습을 알 수 있고, 또 <주교지남>이란 책에 주교 만드는 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조 때 주교가 놓인 자리가 지금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 어디쯤이었다. 그럼 주교 말고 한강에 다리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언제였을까? 그보다 먼저, 한강에는 지금 몇 개의 다리가 있을까? 지금도 어딘가에서 다리 놓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으니 앞으로 계속 늘어나겠지만, 현재 약 30개가 있다. 양화대교를 만들 당시에는 제2 한강교, 한남대교를 제3 한강교라고 불러 번호를 붙였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다리를 이렇게 많이 건설할 줄 몰랐던 것이다. 다른 이름을 짓지 않았다면 지금 제30, 제31 한강교가 생길 뻔 했으니 말이다.
지금 한강철교는 모두 네 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상류 방향)부터 B교, A교, D교, C교라고 부르는데, A교가 1900년에 만든 최초의 다리이고 B교가 1911년에 만든 것이다. C교는 1944년에 새로 만들어졌다. D교는 비교적 최근인 1995년에 경인선 복복선 확장에 따라 건설되었다. A교와 B교는 단선이고 C교와 D교는 복선이며, A·B·D교는 전철이 사용하고 C교는 KTX를 비롯한 열차가 사용한다.
대통령 이승만은 6월 27일에 이미 한강을 건너 대전까지가 있었다. 그러면서 방송을 통해 거짓을 알렸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에서 우리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동요하지 말고 직장을 사수하라”는 내용이었다. 설마 하던 시민들이 아차 하고 피난길에 올랐을 때는 이미 한강 다리가 끊어져 있었다. 심지어는 아무런 예고 없는 폭파로 다리를 건너고 있던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뒤에는 ‘잔류파’, ‘도강파’라는 말이 생겼다. 한강을 건너 피난했다 돌아온 사람들이(도강파), 다리가 끊겨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을(잔류파) 빨갱이로 몰았던 것이다. 서울을 빼앗겼던 3개월 동안 인민군에게 협력했다는 이유였다. 당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의 처지가 어떠했을까? ‘잔류파’였던 역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회고를 소개한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