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횡설수설➌

6월에 생각하는 한강철교

지금 서울은 세계적인 대도시이다. 그 진가는 나라 안에서보다 바깥에서 볼 때 더 두드러진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면, 서울에만 있는 장관이 하나 있다. 바로 큰 강이다. 외국의 어느 도시에서도 한강만큼 큰 강을 찾아보기 힘들다. 런던의 템즈강이나 파리의 센강과 비교해도 한강은 크기에서 압도적이다.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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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에서 시작해 30개 다리가 놓인 한강
한강은 예로부터 서울을 상징했다. 서울의 옛 이름 한양(漢陽)도 한강에서 비롯되었다. ‘양(陽)’이란 ‘산의 남쪽, 강의 북쪽(山之南 水之北)’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니 북한산 남쪽, 한강 북쪽 공간을 가리킨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합류한 뒤 황해로 도도히 흐르는데, 총길이 514km로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이고, 폭은 1km에 달한다. 이 강이 옛날부터 서울의 젖줄이 되어 왔고, 오늘날에는 서울을 대표하는 경관이 되었다.
강은 곧 길이었다. 뱃길을 통해 상류 지역에서 생산된 각종 물자와 전국에서 걷힌 조세가 서울로 집중되었다. 조선 건국 후 한양이 수도가 된 데는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며 교통이 편리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동시에 강은 길을 막기도 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했고, 큰 강은 그만큼 왕래하기가 힘들었다. 한강은 동서로는 길이었지만 남북으로는 길을 막았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정조 때 국왕의 화성(수원) 행차를 위해 주교(舟橋; 배다리)를 놓은 것이 처음이었다. 큰 배 약 40척을 굴비 엮듯이 옆으로 길게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길을 만들었다. 왕의 행차 때만 만들어 사용하고 곧 해체했지만 그림이 남아 있어 그 모습을 알 수 있고, 또 <주교지남>이란 책에 주교 만드는 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조 때 주교가 놓인 자리가 지금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 어디쯤이었다. 그럼 주교 말고 한강에 다리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언제였을까? 그보다 먼저, 한강에는 지금 몇 개의 다리가 있을까? 지금도 어딘가에서 다리 놓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으니 앞으로 계속 늘어나겠지만, 현재 약 30개가 있다. 양화대교를 만들 당시에는 제2 한강교, 한남대교를 제3 한강교라고 불러 번호를 붙였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다리를 이렇게 많이 건설할 줄 몰랐던 것이다. 다른 이름을 짓지 않았다면 지금 제30, 제31 한강교가 생길 뻔 했으니 말이다.
1900년에 완성된 노량철교 ©남도현, <한강철교는 알고 있다>
경인선 철도와 함께 만들어진 최초의 다리, 한강철교
최초의 한강 다리는 1900년에 완성된 한강철교이다. 이 다리는 경인선 철도와 함께 만들어졌다. 경인선은 1897년 3월에 착공되어 1899년 9월 인천~노량진 구간이 개통되었고, 한강철교가 완성될 때까지 1년을 기다려 1900년 7월 경성역까지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 총길이는 628.8m로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긴 다리였고, 주요 부분을 철재로 만든 최초의 철교였다. 공사를 맡은 경인철도 합자회사에서는 “길이 3,000척의 긴 무지개가 하늘에 걸린 것 같다”며 선전했다. 이후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수송량이 증가하자 1911년 다리 하나를 더 만들어 복선화했다. 이때까지는 기차만 통행할 수 있었고, 다른 교통수단이나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인도교는 1917년에야 건설되었다. 지금의 한강대교가 그것으로, 이 다리를 제1 한강교라고 했다.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다음에 건설된 다리가 1965년 양화대교였으니, 이 두 다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이 둘을 품고 있는 용산이 교통의 요지로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 한강철교는 모두 네 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상류 방향)부터 B교, A교, D교, C교라고 부르는데, A교가 1900년에 만든 최초의 다리이고 B교가 1911년에 만든 것이다. C교는 1944년에 새로 만들어졌다. D교는 비교적 최근인 1995년에 경인선 복복선 확장에 따라 건설되었다. A교와 B교는 단선이고 C교와 D교는 복선이며, A·B·D교는 전철이 사용하고 C교는 KTX를 비롯한 열차가 사용한다.
폭파된 한강교 ©전쟁기념관
한강철교 폭파의 비극
한강철교는 1950년 6·25전쟁 때 또 한 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3일 뒤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철교와 인도교가 폭파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가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면서 인민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작전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다리 폭파를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국민들을 속인 정부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이다.
대통령 이승만은 6월 27일에 이미 한강을 건너 대전까지가 있었다. 그러면서 방송을 통해 거짓을 알렸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에서 우리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동요하지 말고 직장을 사수하라”는 내용이었다. 설마 하던 시민들이 아차 하고 피난길에 올랐을 때는 이미 한강 다리가 끊어져 있었다. 심지어는 아무런 예고 없는 폭파로 다리를 건너고 있던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뒤에는 ‘잔류파’, ‘도강파’라는 말이 생겼다. 한강을 건너 피난했다 돌아온 사람들이(도강파), 다리가 끊겨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을(잔류파) 빨갱이로 몰았던 것이다. 서울을 빼앗겼던 3개월 동안 인민군에게 협력했다는 이유였다. 당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의 처지가 어떠했을까? ‘잔류파’였던 역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회고를 소개한다.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서울시민의 99% 이상)은 정부의 말만 듣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赤軍)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UN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 있은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 하여 곤박이 자심하니 고금 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있을 것인가.
김성칠, <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일기>
이래도 이승만 정권의 한강 다리 폭파를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하겠는가? 거짓말로 국민을 속인 것부터 정부를 믿고 일찍 피난길에 오르지 않은 사람들을 배신한 것까지, 책임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정부의 말을 믿고 따르면 안전하다는 최소한의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한 것이다. 광복 후 친일파가 득세하고 독립운동가들이 홀대받은 것과 더불어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은 국민들이 국가와 정부를 불신하게 되는 뿌리가 되었다. 이 점에서 역사적 과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