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횡설수설➋

용산에는 김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각 지방의 현황을 정리해서 책을 만드는 전통이 있었다. 이런 책을 지리지(地理志)라고 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앞으로 내 글에 많이 등장할 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종합 정보지이다. 이 책에는 군현의 연혁과 본관 성씨, 유명한 산과 강, 정자, 절, 능묘 등 다양한 정보가 실려 있다. 그뿐 아니라 수령으로서 치적을 남긴 사람은 누가 있는지, 그 군현과 연고가 있는 유명한 인물이 누가 있는지를 기록했다. 용산구에서 지리지를 만든다면 누가 첫 번째 인물로 꼽힐까? 나는 단연 백범 김구라고 생각한다.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이미지 클릭 시 확대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까방권’에 근접한 독립운동가 김구
방송계에 ‘까방권’이란 말이 있다. ‘까임 방지권’을 줄인 말이다. ‘까다’란 ‘결함을 들추어 비난하다’라는 뜻의 속어이니, 사람들로부터 까임을 당하지 않을 특권이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게 확실하게 까방권이 있고, 그밖에는 김구가 가장 근접해 있다. 그만큼 온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가 용산구에 잠들어 있다.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주로 고향 근처 황해도에서 살았다. 스물한 살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분개한 나머지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를 범인으로 몰아 살해하는 과감한 행동을 했다. 그 일로 해주 감옥에 갇혔다가 7월에 인천의 감리서에 이감되었고, 거기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집행 직전 고종의 명으로 목숨을 구했다. 이듬해 봄 탈옥에 성공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삼남 지방으로 잠행했고,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다가 반년 만에 환속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와 상동교회에서 열린 반대운동에 참가했다.
1909년 34세 때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 풀려났고, 1911년에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17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감형되어 이듬해 출옥했다. 30대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셈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해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서, 1945년 11월 귀국할 때까지 26년 동안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해방 정국에서는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으며, 7월 5일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효창공원을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만들다
김구와 연고가 있는 장소가 국내에는 많지 않다. 고향은 북한이고, 평생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두 차례 수감 생활을 한 인천, 탈옥한 뒤 숨어 다닌 삼남의 여러 지역, 해방 후에 거처한 서대문 경교장 정도를 손에 꼽을 수 있다. 지금 인천대공원에 백범광장과 김구 동상이 있다. 탈옥 후 은거한 보성과 함평에도 은거가가 보존되어 있고, 광주에 백범기념관이 있다. 서울 남산공원에도 백범광장과 동상이 있다. 하지만 용산구 효창공원이야말로 그가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이다.
효창공원은 김구 이전부터 있었다. 그 역사는 1786년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묘를 이곳에 만들 때부터 시작된다. 그때는 효창묘(孝昌墓)라고 했고, 묘역은 지금의 효창공원보다 훨씬 넓었다. 그 뒤 몇몇 왕실 묘가 이곳에 자리 잡았고, 1870년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되었다.
효창원은 나라가 망하면서 기구한 운명을 겪는다. 1921년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이 들어섰다. 골프장은 3년 만에 폐쇄되었지만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1924년 효창공원으로 되면서 공중화장실 같은 편의 시설이 들어섰다. 본래 주인이던 왕실 묘들은 1944년 고양군의 서삼릉 권역으로 이장되었다.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가들의 묘지로 꾸민 사람은 김구였다.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안장하고 그 옆에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만들어 미래의 봉환을 준비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약한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세 분의 묘소도 조성했다. 김구 자신도 여기 묻히면서 효창공원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용산이 김구를 기념하는 방법
이처럼 용산은 김구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용산구는 김구를 특별히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 용산구민의 <백범일지> 읽기는 어떨까? 이 책은 김구가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것인데, 참 재미있다. 김구의 삶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 이광수의 손을 빌어 완성했기 때문에 마치 한 편의 무협지를 읽는 것 같다. 김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읽을 책이다.
용산구의 인물로 김구를 추천했으니, 원효대사 이야기도 해야겠다. 효창공원에 원효대사의 동상이 있고, 원효로나 원효대교 같은 이름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원효대사는 생전에 이곳과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경주가 서울인 시절에 이곳까지 올 일이 없었다.
원효로는 식민지 시기에 이름이 원정(元町, 모토마치)이었다. 해방 후인 1946년 1월에 일본식 지명을 고치면서 위인들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세종로, 충무로, 을지로, 퇴계로 등이 그것이다. 원효로라는 이름도 그때 만들어졌다. 아마도 원정의 ‘원’ 때문에 원효대사가 연상되었던 모양이다. 원효대사 동상은 1969년에 만들었다. 당시 덕수궁에 세종대왕, 세종로에 이순신 등 위인 열다섯 분의 동상을 세웠는데, 모두 장소와 연관이 없었다. 원효대사도 훌륭한 분이고, 이곳에 동상을 만들고 지명으로 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유래는 알고 있어야겠기에 한 마디 적어 둔다.
지금 효창공원에는 반공투사 위령탑, 대한노인회관, 효창운동장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 모두 필요해서 만들었겠지만 이렇게 복잡하다 보니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무언가를 기념할 때는 왜 그곳에서 기념하는지가 분명해야 한다. 그것이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다.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