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횡설수설➊

용산구에 용산이 없다

용산구의 이름은 용산(龍山)이라는 산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용산이 없지만 옛날에는 있었다. 도시를 개발하면서 크고 작은 산들을 모두 밀어 버리는 바람에 없어진 것이다. 그럼 옛날에는 용산이 어디에 있었을까?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용산처, 용산방, 용산강의 흔적
먼저, 용산의 흔적부터 찾아야겠다. 현재 용산구 일대의 고려시대 행정구역 이름은 ‘용산처(龍山處)’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에 속한 ‘용산방(龍山坊)’이라고 했다. 모두 용산이 있음으로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또 한강의 용산 구간을 ‘용산강’이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강원도 오대산에서 발원한 한강이 한양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 노량, 용산강, 서강, 양화도(楊花渡)를 거친다고 되어 있다. 옛날에는 한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강이라고 부르지 않고 구간별로 다르게 불렀는데, 노량부터 서강 사이를 용산강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이름도 용산 때문에 붙은 것이니, 노량부터 서강 사이 어딘가에 용산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음으로는 서울의 산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 후기에 신경준이 지은 「산경표」는 우리나라 산의 족보와도 같은 책이다. 그 책을 보면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중앙쯤인 철원 근처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달려가는 산줄기가 한북정맥이고, 한북정맥의 끝이 서울의 진산이 되는 북한산이다. 북한산 줄기가 남쪽으로 흘러가 백악(지금 이름은 북악산)이 되고, 더 가서 인왕산이 된다. 우리가 찾고 있는 용산은 인왕산부터 시작된다.
지금부터 200년 전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서울의 산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인왕산 서쪽에 추모현이 있고 또 무악이 있다. 무악에서 한쪽 기 슭이 남쪽으로 내려가 약현과 만리현이 되고 용산에 이른다. 무악에서 다른 한쪽 기슭이 서남쪽으로 내려가 계당치가 되고 와우산과 잠두봉에 이른다.
추모현은 지금의 무악재이고, 무악은 안산의 옛날 이름이다. 또 약현과 만리현(만리재)은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다. 정리하면 북한산-북악산-인왕산-안산으로 이어지다가 약현·만리재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있었고, 그 끝에 용산이 있었던 것이다.
개발로 사라진 용산의 흔적 찾기
「동국여지비고」는 또 용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여 놓았다.
용산은 한양 도성 밖에서 서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군자감과 훈국의 별영이 거기에 있다. 용산과 와우산은 모두 한강가에 있다.
용산이 한강가에 있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북한산에서 시작해서 인왕산·안산과 약현·만리재를 거쳐 내려온 산줄기가 한강 가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만든 산봉우리가 바로 용산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고증을 통해 용산이라는 산이 실제 있었음과, 어디쯤 있었는지가 증명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럼 그 결과를 지도에서 확인해 보자. 조선 후기에 김정호가 그린 「경조오부도」라는 지도가 있다. 경조(京兆)란 수도를 뜻하고, 오부(五部)는 한성부의 행정구역이니, 경조오부도란 한성부 행정지도라는 뜻이 되겠다. 왼쪽 지도가 그것이다.
지도를 보면 무악에서 아현(阿峴), 만리현, 효창묘(孝昌墓), 만리창(萬里倉), 군자감 별고(別庫)를 거쳐 읍청루(挹淸樓)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끝에 ‘龍山’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지도에 붉은 색으로 표시해 두었다.) 지금으로 치면 용산구와 마포구 경계쯤이 될 것이다. 지금 용산구에는 용산이 없다. 도시 개발로 흔적조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위치를 확인해서 표시하는 것이 지금 용산구에서 해야 할 일이다. 용산구 역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용처럼 신령하고 좋은 도시 되어야
용산을 찾았으니, 이제 용산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잡는 일이 남았다. 한강에 용이 나타나서 용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다. 「증보문헌비고」에 “백제 기루왕 21년(서기 97년)에 용 두 마리가 한강에 나타났으므로 용산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이해 4월에 용 두 마리가 한강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이 나타났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믿기 어렵다. 용이 실제로 없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용이 나타났기 때문에 용산이라고 했다는 「증보문헌비고」의 기록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용의 출현과 용산이라는 지명의 출현은 별개 문제이고, 둘 사이의 연관성을 증명할 자료가 있어야 한다. 「증보문헌비고」는 1903년부터 1908년 사이에 편찬된 책이다. 용이 출현했다는 백제 시대와 멀리 떨어져 있기는 지금과 다르지 않고, 그래서 용산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말을 증명할 근거가 없는 것 또한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용산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산봉우리의 흐름이 마치 용과 같으면 붙일 수 있어서 산 이름을 짓는 데 많이 이용되었다. 용수산, 용두산, 용문산, 청룡산, 황룡산, 반룡산, 구룡산, 계룡산 등 용이 들어간 산 이름은 전국에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용은 옛날부터 황제를 상징하는 지존(至尊)의 신수였고, 민간에서 신성시하는 영물(靈物)이었다. 지금도 용꿈은 돼지꿈보다 한수 위의 길몽이다. 용산은 용의 모습을 한 산일 뿐 아니라 용처럼 신령스런 산이기도 하다. 그 이름을 가진 용산구도 이름만큼 좋은 곳이 아니겠는가.
용산 횡설수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은 정몽주를 평하기를, “횡설(橫說)과 수설(竪說)이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했다. 가로로 얘기해도(횡설), 세로로 얘기해도(수설) 모두 이치에 맞는다는 칭찬이었다. 횡설은 한 시대에 여러 장소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고, 수설은 한 장소에서 여러 시대에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 말로 고치면 공간 이야기와 시간 이야기가 되겠다. 2021년 4월부터 용산의 공간과 시간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독자 여러분께서 많이 사랑해 주시길 바란다.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