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에 용산이 없다
또 한강의 용산 구간을 ‘용산강’이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강원도 오대산에서 발원한 한강이 한양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 노량, 용산강, 서강, 양화도(楊花渡)를 거친다고 되어 있다. 옛날에는 한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강이라고 부르지 않고 구간별로 다르게 불렀는데, 노량부터 서강 사이를 용산강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이름도 용산 때문에 붙은 것이니, 노량부터 서강 사이 어딘가에 용산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음으로는 서울의 산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 후기에 신경준이 지은 「산경표」는 우리나라 산의 족보와도 같은 책이다. 그 책을 보면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중앙쯤인 철원 근처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달려가는 산줄기가 한북정맥이고, 한북정맥의 끝이 서울의 진산이 되는 북한산이다. 북한산 줄기가 남쪽으로 흘러가 백악(지금 이름은 북악산)이 되고, 더 가서 인왕산이 된다. 우리가 찾고 있는 용산은 인왕산부터 시작된다.
지금부터 200년 전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서울의 산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인왕산 서쪽에 추모현이 있고 또 무악이 있다. 무악에서 한쪽 기 슭이 남쪽으로 내려가 약현과 만리현이 되고 용산에 이른다. 무악에서 다른 한쪽 기슭이 서남쪽으로 내려가 계당치가 되고 와우산과 잠두봉에 이른다.
추모현은 지금의 무악재이고, 무악은 안산의 옛날 이름이다. 또 약현과 만리현(만리재)은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다. 정리하면 북한산-북악산-인왕산-안산으로 이어지다가 약현·만리재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있었고, 그 끝에 용산이 있었던 것이다.
용산은 한양 도성 밖에서 서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군자감과 훈국의 별영이 거기에 있다. 용산과 와우산은 모두 한강가에 있다.
용산이 한강가에 있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북한산에서 시작해서 인왕산·안산과 약현·만리재를 거쳐 내려온 산줄기가 한강 가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만든 산봉우리가 바로 용산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고증을 통해 용산이라는 산이 실제 있었음과, 어디쯤 있었는지가 증명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럼 그 결과를 지도에서 확인해 보자. 조선 후기에 김정호가 그린 「경조오부도」라는 지도가 있다. 경조(京兆)란 수도를 뜻하고, 오부(五部)는 한성부의 행정구역이니, 경조오부도란 한성부 행정지도라는 뜻이 되겠다. 왼쪽 지도가 그것이다.
지도를 보면 무악에서 아현(阿峴), 만리현, 효창묘(孝昌墓), 만리창(萬里倉), 군자감 별고(別庫)를 거쳐 읍청루(挹淸樓)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끝에 ‘龍山’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지도에 붉은 색으로 표시해 두었다.) 지금으로 치면 용산구와 마포구 경계쯤이 될 것이다. 지금 용산구에는 용산이 없다. 도시 개발로 흔적조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위치를 확인해서 표시하는 것이 지금 용산구에서 해야 할 일이다. 용산구 역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용산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산봉우리의 흐름이 마치 용과 같으면 붙일 수 있어서 산 이름을 짓는 데 많이 이용되었다. 용수산, 용두산, 용문산, 청룡산, 황룡산, 반룡산, 구룡산, 계룡산 등 용이 들어간 산 이름은 전국에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용은 옛날부터 황제를 상징하는 지존(至尊)의 신수였고, 민간에서 신성시하는 영물(靈物)이었다. 지금도 용꿈은 돼지꿈보다 한수 위의 길몽이다. 용산은 용의 모습을 한 산일 뿐 아니라 용처럼 신령스런 산이기도 하다. 그 이름을 가진 용산구도 이름만큼 좋은 곳이 아니겠는가.